TUTU21_
카테고리
작성일
2023. 12. 25. 23:30
작성자
eatu

 
 
 
 고해합니다.
 당신을 수천 번 그려내었던 노트를,
 당신의 생일만을 기다리고 준비했던 그 시간을,
 당신이 지었던 웃음이 생각나 시집이 쌓여있는 공간에 멈추어 서서 보냈던 마음을,
 같이 찍은 사진 속의 토끼 머리띠를 보며 피실대었던 비밀을,
 당신께 결국 고해하겠습니다.
 
 
 
 우리는 열일곱이 조금 넘었던 날에 만났다. 교차점이 없는 자에게 말을 걸기 최적의 순간이었으나 그때는 과오를 무수히 범하는 시기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너와 친해지지 않는 것도 나의 과오일 것이다. 시작은 지독하게도 평범했다. 눈에 한 번 들어온 것이 다였다. 쟤 이름이 홍려운이였지. 그런 속말 한 번. 동아리 부장이라는 직책이 사람을 바꾸게도 하는지, 그 이후 나의 시선을 캔버스 바깥으로 돌리게 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노트 귀퉁이에 네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겹쳐진 연필 선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구겼다. 누가 볼까 학교 쓰레기통에다가 버리지도 못하고 가방에 넣고 집에 돌아와서야 처분했다. 두세 번 그런 일이 반복되고, 이후에는 그냥 노트에 남겨두었다. 도저히 고칠 습관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성격 상 쌓아두는 것 보다는 유유히 흘려보내는 것이 더 맞았다. 그렇게 내 무의식은 모두 네가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에 곁눈질로 너를 봐가며 귀퉁이에 작게 그려낸 그림은, 시간에 적셔져 몸을 키우더니 아예 큰 캔버스로 옮아갔다. 나는 이제 눈을 감고도 내 몸집만한 곳에 너를 그릴 수 있었다. 허락되지 않은 초상화를 그리느라 얼마나 많은 도구들을 이용했는지 너는 모를 거다. 하루는 온 곳이 새까매지도록 목탄을 썼고, 다른 하루는 손끝이 아리도록 철필을 썼고, 또 다른 하루는 끝도 없이 짧아지고 있는 연필을 썼다. 오로지 너를 그리기 위함이었다.
 끝내 그 흑백의 모양에 빛깔을 덧칠했을 때야 나는 인정했다. 사실 있잖아. 나도 꽤 무서워. 앞서가는 나를 보고 네가 아예 포기해버리면 어쩌지. 내 확고한 애정이 너에게 부담으로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 마음은 그렇게 빨리 얘기하면서도 너에 대한 건 하나도 단언하지 못했다. 너의 미룸을 기다린 게 아니다. 나는 네가 미루기만을 원했다.
 네가 결정을 하는 순간, 애처롭게 서있던 것은 모두 무너뜨리고 새로 시작해야 했다. 네게 좋은 말들을 속삭이는 것과 함께 나아가는 것은 전혀 달랐다. 따로 나아가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을 너를 알면서도, 먼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짚지 않았다. 예전의 치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불안한 현재에 안주했다. 이것만이 최선이라 되뇌이며.
 완성된 그림을 보며 붓을 내려놓았다. 똑같은 힘을 오랫동안 주어 손이 떨렸다. 두껍게 발린 유화 물감이 아직 마르지 않아 번들거렸다. 임파스토 특유의 강한 입체감이 눈을 자극한다면 유화의 묵직한 냄새가 코를 잠식시켰다. 완전히 마르려면 한 달이 걸릴 테다. 나는 손을 죄암거리며 창문을 더 열었다. 재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한심하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너로 인해 그런 사람이 되었나? 차가워진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뻣뻣한 듯 싶다가도 유연하게 구부러진 머리칼. 햇빛 아래에선 더욱 투명하게 빛나는 눈. 어렴풋이 구멍이 보이는 귓불. 잘 뻗어있는 손가락 사이에 간간히 끼워져있는 실반지. 아른거리는 모습은 오로지 홍려운의 것이다. 나는 그 머리칼에 이마를 맞대고 잠을 자고, 빛나는 눈두덩이 위로 입을 맞추고, 귓불을 매만지며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고, 내가 선물해준 악세사리만이 네 손에 있었으면 했다. 나는 이전에도, 지금도,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손을 움찔거렸다. 이대로라면 평생을 이렇게 살 거다. 이렇게 가벼운 공기를 쥐어내고 싶지 않았다. 네 온기를 가지고 싶었다. 태초의 나의 마음은 그랬다.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발에 힘을 주어 땅을 박차며 일어섰다. 앞치마를 벗었다. 나갈 채비를 한다. 다리가 부러져도 갈 각오로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직 네가 나에게 와준다는 그 말, 그 한 마디만을 희망으로 품고 바깥을 나섰다.
 네게 집 앞으로 갈 테니 준비하고 나오란 문자를 남기고, 옷을 펄럭이며 최대한 물감 냄새를 날렸다. 억지같은 향수를 뿌릴 생각조차 못했다. 한없이 부족한 치장을 급하게 덧붙여간다. 눈은 느리게도 떨어지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도 짧다. 너와 있는 순간이 모두 짧다. 그러니 더욱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이 짧은 시간이 더는 헛되게 흘러갈 순 없었다.
 이제 이만하면 됐어, 그만하면 좋겠어. 더 이상 재고 있지 않을 테야. 사랑은 마음대로 되지 않겠지만 상관없었다. 상관없지 않았지만, 최악인 상황이 닥쳐도 좋았다.* 네 진심을 엿볼 수 있다면 쓰디쓴 웃음마저 내어주리라. 우리가 포기하기 전에 내가 도전할 것이다. 일말의 다정을 믿고 널 보며 입을 연다. 빛나는 건물 아래에서.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순간에서. 백연에 소리가 가려지지 않도록 바른 음성으로.
 
“내가 못 하게 했던 대답을 듣고 싶어.”
 
 겨울바람에 바싹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새빨개진 손에 긴장이 묻어났다. 이 깊은 무게로 모든 것을 무너뜨려야 했다. 기꺼이 이 관계를 엎는다. 간절히 바라며 네게 묻는다.
 
“홍려운, 날 사랑해?”
 
 
 
 
 
 
 
 
 
 
 

*신인류, 너의 한마디 인용















배를 매며: 如果爱情也有流通期限

세상은 대체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왼쪽과 오른쪽, 찬물과 뜨거운 물, 한다와 안 한다, 좋다와 싫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홍려운은 생각했다. 그냥 적당히 중간을 선택하면 안 되는 건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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